우리는 왜 '네모로직'이라고 부를까 — 나라마다 다른 노노그램의 이름들
노노그램을 검색하다 보면 이상한 일을 겪게 됩니다. 분명 같은 퍼즐인데 부르는 이름이 제각각이죠. 노노그램, 네모로직, 네모네모로직, 피크로스, 한지, 그리들러, 페인트 바이 넘버스... 앱스토어에서 검색어를 뭘로 넣느냐에 따라 나오는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곤 합니다.
사실 규칙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행과 열에 적힌 숫자를 보고 칸을 칠해 그림을 완성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름만 열 개가 넘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답을 따라가다 보면 1987년 도쿄에 도착합니다.
빌딩 불빛에서 시작된 퍼즐
이시다 논(石田のん)은 원래 그래픽 에디터였습니다. 1987년, 그는 고층 빌딩의 창문 불빛을 켜고 끄는 방식으로 거대한 그림을 만드는 디자인 대회에 참가해 우승했습니다.
건물 하나가 거대한 도트 매트릭스가 되는 셈이죠. 창문 하나가 픽셀 하나고, 불이 켜지면 검은 칸, 꺼지면 빈 칸이 됩니다. 그는 여기서 퍼즐의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격자를 채워 그림을 만드는 놀이.

이시다는 1988년 일본 퍼즐 잡지에 세 편의 문제를 실었습니다. 이름은 '윈도우 아트 퍼즐(Window Art Puzzles)'. 창문에서 시작된 퍼즐이니 어울리는 작명이었습니다.
같은 해, 다른 사람
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있습니다. 같은 시기에 니시오 테츠야(西尾徹也)라는 퍼즐 작가도 거의 똑같은 퍼즐을 만들고 있었죠. 두 사람은 서로를 전혀 몰랐답니다. 완전히 독립적인 발명이었습니다.
니시오는 자신의 퍼즐에 '오에카키 로직(お絵かきロジック)'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직역하면 '그림 그리기 논리'. 그림을 그린다는 결과와 논리로 푼다는 과정을 이름에 다 담은 셈입니다.
이 이름을 기억해두세요. 나중에 한국 이야기를 할 때 다시 나옵니다.
영국이 붙인 이름, '노노그램'
퍼즐은 일본 잡지를 거쳐 해외로 퍼졌습니다. 영국의 퍼즐 수집가 제임스 달게티(James Dalgety)가 이 퍼즐에 주목했고, 1990년 선데이 텔레그래프에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이름이었습니다. '오에카키 로직'을 영국 신문에 그대로 쓸 수는 없었습니다. 달게티는 발명자의 이름에서 따오기로 했습니다. 이시다 '논(Non)'에, 그림이나 기록을 뜻하는 접미사 '-gram'을 붙였습니다. 그렇게 Nonogram이 태어났습니다.
흔히 알려진 오해 하나
한국 인터넷에는 다른 설명이 돌아다닙니다. "칠하지 않는 칸을 확인하는 게 중요해서 non(아니다)이 붙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럴듯하긴 합니다. 실제로 노노그램을 풀 때는 확실히 칠해지는 칸만큼이나 확실히 비는 칸을 표시하는 게 중요하니까. X 표시를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큰 퍼즐은 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이 이름은 사람 이름에서 왔습니다. 풀이 기법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럴듯한 설명이 먼저 퍼지고 진짜 유래가 묻히는 일은 흔한데, 이것도 그런 경우입니다.
닌텐도가 만든 이름, '피크로스'
1995년, 닌텐도가 이 퍼즐을 게임보이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새 이름을 붙였습니다. 'picture crossword'를 줄인 피크로스(Picross).
이 이름은 지금도 가장 널리 알려진 축에 속합니다. 콘솔 게임으로 처음 접한 사람에게 이 퍼즐은 영원히 피크로스입니다.
문제는 이게 닌텐도의 등록상표라는 점입니다. 다른 회사는 함부로 쓸 수 없습니다. 실제로 '피크로스 루나', '피크로스 갤럭시'라는 이름으로 나왔던 게임들이 나중에 이름을 바꿔야 했습니다. 지금은 각각 '루나 이야기', '노노그램 갤럭시'로 불립니다.
퍼즐 자체에는 저작권이 없지만 이름에는 있습니다. 그래서 개발사들은 저마다 다른 이름을 찾아 쓰게 됐고, 이름의 가짓수는 더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밖의 이름들
- 그리들러(Griddlers) — grid(격자)와 riddle(수수께끼)를 합친 말입니다. 영국과 유럽 퍼즐책에서 주로 씁니다. 이것 역시 상표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 한지(Hanjie) — 영국에서 그리들러와 섞어 쓰는 이름입니다. 일본어에서 왔습니다.
- 페인트 바이 넘버스(Paint by Numbers) — 상표를 피한 서술적 이름입니다. 숫자로 칠한다는 규칙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 일본 크로스워드 — 러시아에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출신지를 그대로 이름에 박아 넣었습니다.
이 밖에도 픽어픽스, 로직 아트, 일러스트 로직 등 확인된 이름만 스무 개가 넘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여기서부터가 재밌습니다.
한국에서 이 퍼즐은 네모네모 로직, 줄여서 네모로직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영어권 이름들을 다시 볼까요. 노노그램, 피크로스, 그리들러, 한지, 페인트 바이 넘버스. 어디에도 '로직'이 없습니다.
왜 우리만 '로직'일까요.
경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구권은 일본 → 영국 → 세계의 경로로 이 퍼즐을 받았습니다. 달게티가 이름을 새로 지었고, 닌텐도가 또 다른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식 이름은 사라졌습니다.
한국은 일본에서 바로 받았습니다. 제우미디어가 니시오 테츠야의 퍼즐을 직접 받아 책으로 엮었습니다. 1권부터 6권까지가 그렇게 나왔고, 7권부터는 오리지널 퍼즐도 함께 실었습니다.
일본 원명이 '오에카키 로직'이었다는 걸 떠올려보세. 한국어 이름 '네모네모 로직'은 그 '로직'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입니다. '오에카키(그림 그리기)' 자리에 '네모네모'가 들어갔을 뿐입니다.
즉 한국어 이름은 영어를 거치지 않은, 일본 원명의 직계이죠. 우리만 '로직'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름은 달라도
퍼즐 하나가 세계로 퍼지면서 스무 개가 넘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발명자의 이름을 딴 것도 있고, 게임 회사가 만든 상표도 있고, 상표를 피하려고 만든 서술적 이름도 있습니다. 한국어 이름은 일본에서 직수입된 흔적을 아직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변하지 않은 건 바로 규칙입니다.
숫자만큼 연속해서 칠한다. 숫자와 숫자 사이는 최소 한 칸 비운다. 숫자의 순서와 칠해진 순서는 같다.
1987년 도쿄의 빌딩 불빛에서 시작된 이 세 줄짜리 규칙은, 이름이 어떻게 바뀌든 그대로입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 만든 퍼즐이든 같은 방식으로 풀립니다. 그게 이 퍼즐이 서른 년 넘게 살아남은 이유일 것입니다.
규칙이 아직 낯설다면 노노그램 초보자 완벽 가이드를 먼저 읽어보시길 권장드립니다. 바로 풀어보고 싶다면 전체 퍼즐 목록에서 5x5짜리부터 시작하면 됩니.
